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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불짜리 칼에서 폭동이 시작됐다

지난해 발생한 볼티모어 폭동의 도화선은 일반 가게에서 판매하는 4달러짜리 칼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프레디 그레이가 소지한 칼은 체포 당시부터 기소 경관들에 대한 법정 공방 때까지 전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소지 여부의 적법성을 둘러싸고 논란이 된 칼(사진)을 볼티모어 경찰이 전격 공개했다.  경찰이 공개한 그레이가 소지한 칼은 칼날이 3인치 정도며, 일반적으로 보조 칼(assist knife) 또는 구조용 보조 칼로 불리고 있다. 소매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체포 당시 그레이가 소지한 흉기는 용수철이 들어 있어 튀어나오듯 칼날이 나온다고 밝혔다. 볼티모어 시내에서는 불법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검찰은, 경찰의 설명과는 달리 그레이가 소지한 칼은 현행법상 불법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관련 경찰 6명을 기소했다.   볼티모어 순회법원은 경찰관에 대한 재판을 진행해 3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이후 나머지 3명의 경관에 대한 기소를 철회했다. 무죄 판결을 받은 경관들은 매릴린 모스비 검사장을 직권 남용 혐의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연방 검찰은 혐의가 없다며 각하했다.   한편 그레이는 지난해 4월 경찰을 피해 달아나다 붙잡혀 호송차로 이송 중 목뼈를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숨졌다. 그의 장례식 후 시위는 폭동으로 번졌다.   허태준 기자

2016-10-19

'프레디 사망' 경찰 "무죄"…볼티모어 흑인폭동 도화선

볼티모어 흑인 폭동의 도화선이 된 프레디 그레이(사망당시 25세) 사망사건으로 기소된 경찰 6명 중, 두 번째로 법정에 선 에드워드 네로 경관(30)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그레이는 지난해 4월 경찰에 체포된 뒤 호송차량을 타고 이동하던 도중 척추 중상을 호소했지만 이는 무시됐고 결국 약 1주일 뒤에 목숨을 잃었다. 그레이의 죽음을 계기로 볼티모어에서는 경찰의 직권 남용이나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약탈과 방화를 수반하는 대규모 폭동사태로 이어졌다. 23일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순회법원은 그레이 사망의 가해 경찰관으로 폭행혐의로 기소된 네로 경관이 그레이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작은 역할만 했다면서 그의 주요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판결했다. 이날 선고는 배심원 평결 없이 판사의 판결만으로 이뤄졌다. 베리 윌리엄스 판사는 "범죄가 발생하는 당시 네로 경관이 의도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가 없다"면서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볼티모어 순회 법원은 지난해 12월 다른 피소 경관 윌리엄 포터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언했다. 법원은 나머지 4명의 관련 경찰관들에 대한 재판을 순차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이번 판결로 인해 흑인 인권단체의 반발이 예상되고 있다. 원용석 기자 won.yongsuk@koreadaily.com

2016-05-23

'프레디 그레이' 관련 경관 무죄

볼티모어의 흑인 청년 '프레디 그레이 사망사건'에 연관된 경관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순회법원은 23일, '프레디 그레이 사망사건'으로 기소된 경관 6명 가운데 한 명인 에드워드 네로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고 산호세 머큐리가 이날 인터넷판에서 보도했다. 이날 선고는 배심원 평결 없이 판사의 판결만으로 이뤄졌다. 담당 판사는 네로 경관이 그레이 체포과정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 네로 경관은 폭력과 직권 남용 등 모두 4건의 혐의로 기소됐었다. 프레디 그레이는 지난해 4월 경찰에 체포된 뒤 호송차량을 타고 이동하던 도중 척추에 중상을 입었고 약 1주일 뒤 결국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지역 흑인사회에서는 경찰의 직권남용과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이는 약탈과 방화를 수반하는 대규모 폭동으로 사태가 커져 전국적인 이슈로 떠올랐었다. 볼티모어 순회 법원은 지난해 12월 다른 피소 경관 윌리엄 포터에 대한 재판에서 배심원단이 포터의 유·무죄 여부에 대해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에 재판 무효를 선언한 바 있다. 관련 경관의 재판에서 잇달아 실형이 선고되지 않은 결과여서 앞으로 흑인사회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주목되고 있다. 이날 법원 앞에는 '경찰 폭력'에 항의하는 소수의 시위대가 있었고 법원 판결 이후 일부 시위대가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물리적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나머지 4명의 관련 경관에 대한 재판은 올해 순차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김병일 기자 kim.byongil@koreadaily.com

2016-05-23

폴 에드워드 네로 경관, “무죄” …볼티모어 시장 “주민들 자제” 요청

프레디 그레이 사망사건으로 기소된 경찰 6명 중 하나인 폴 에드워드 네로(30) 경관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23일 오전 볼티모어 순회법원 베리 윌리엄스 판사는 검찰이 기소한 4건의 혐의에 대해 “유죄로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면서 무죄 판결을 내렸다. 판결 직후 네로 경관은 눈물을 흘리면서 변호인들과 껴안고 기쁨을 나눴다. 마크 자이온 변호사는 “네로 경관의 악몽같은 나날들이 마침내 끝났다”고 네로 경관과 가족들에게 축하를 전했다. 스테파니 로울링 블레이크 볼티모어시장은 주민들에게 "판결에 대해 평정심을 유지하기 바란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시장은 성명서에서 ”사법부의 판단을 인정해야 하며, 무죄판결을 받은 네로 경관의 직무 유지 여부에 대해서는 경찰국 위원회에서 판단할 것“이라면서 ”시정부는 만약의 사태가 벌어질 경우 주민들과 업소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충분한 대비태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볼티모어시 경찰국 T.J. 스미스 대변인은 무죄판결을 받은 네로 경관은 “사건으로 기소된 5명의 재판이 끝나고 경찰국 내사과의 조사가 완결될 때까지 내근직을 유지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박세용 기자

2016-05-23

“상처 크지만, 한인사회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해 4월 볼티모어 폭동이 한인 사회에 남긴 상처는 여전히 크고 현재 진행형이다. 비록 외형적인 모습으로는 정상을 되찾았지만, 아직 한인 업소 중 일부는 불에 탄 가게를 열지 못한 곳도 있고, 시 정부를 상대로 한 피해 업소들의 소송도 한창이기 때문이다.   폭동 1주년을 맞아, 한인들이 바라본 볼티모어 폭동의 의미와 당시 대응, 앞으로 한인사회가 나가야 할 과제 등을 폭동 당시 맨 앞에서 활동한 이들을 통해 짚어본다. 좌담회는 1년 전 바로 그날인 27일 오후 3시 메릴랜드 총국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편집자 주>    좌담회 참석자:  백성옥 MD 한인회장  송기봉 MD 식품주류협회 회장  최향남 한인 여성회 회장  찰리 성 변호사  진행 허태준 기자    -꼭 1년 전이다. 지난해 볼티모어 폭동은 한인사회에 많은 문제점과 도전 과제도 던져줬다. 지난 1년간 한인사회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나    송기봉(이하 송): “긍정적인 부분은 협회 회원 가입이 조금 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면에서 바뀐 것이나 달라진 부분은 없다.”   찰리 성(이하 성): “한인 사회에 큰 변화는 없다. 다만 상처만 계속되고 있다. 비즈니스 환경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피해만 더 커졌다.”   백성옥(이하 백): “모든 일이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 같다. 침체 되면 침체했지 좋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한 건 없는 것 같다.”   최향남(이하 최): “한인사회가 당시에도 볼티모어의 문제로 한정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별로 관심도 없었다. 지금도 하나도 안 변했다.”    -폭동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한인사회에서 본 볼티모어 폭동 원인은  성: “단순히 프레디 그레이 사망이 원인이 아니다. 70년대 이후 공장 지대가 떠나면서 일자리가 없어졌다. 아이들은 사실상 고아들이 됐다. 실업률과 범죄, 마약이 혼합된 악순환의 고리에서 그레이가 도화선이 됐다.”   최: “못 배우고 소득이 없는 상태에서 연쇄적인 문제들이 결합해 일어났다.”   백: “볼티모어에서만 30년을 살았다. 흑인들은 피해 의식이 크고, 항상 핑곗거리를 찾는 것 같다. 그레이를 통해 낙담을 폭력으로 분출했다.”    -폭동사태를 처음부터 경험했다. 당시 폭동에 대처하는 한인사회의 모습, 어떠했나.  최: “처음으로 겪는 상황이다 보니 초기에 우왕좌왕하는 모습도 있었다. 특히 주류사회에 한인들의 현황과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2세들의 참여가 필요하다. 앞으로 이러한 상황이 또다시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배우고 고민해야 한다.”     백: “한인 부모들은 2세들에 자신의 삶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고생할망정 자식들은 일을 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부모의 상황을 알게 하고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자녀들에게 반드시 알려줄 필요가 있다.”   성: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최대한 열심히 했다고 생각한다. 한인 커뮤니티가 동참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랑스러워했다. 다만 초기 일 처리 과정에서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도 한다. 가령 일부 행사의 경우 실질적인 도움이 없었다. 특히 각 기관이 약속한 부분을 확인하고 이행하는지를 따지지 못한 것이 아쉽다.”   송: “당시에는 주위에서 무엇을 해준다는데 기대가 컸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피해를 당한 한인들의 삶이 준비가 안 돼 있었다. (세금 보고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준비됐더라면 쉽게 권리를 찾았을 것이다.” -1주년을 맞아 볼티모어 피해 상인들을 둘러봤다. 많은 이들이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는 볼티모어 한인 비즈니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백: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의 세금 보고는 예전보다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영세 비즈니스는 운영 방법을 개선하기가 쉽지 않다. 그동안은 사실상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대책은 없었다. 이번 폭동 사태를 계기로 미래를 내다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폭동 관련 소송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성: “처음 소송에 참여한 65개 업소 중 15개 업소가 빠졌다. 지금은 50개 업소가 소송을 진행 중이다. 올 초 시 정부에서 소송 참여 업소들의 구체적인 피해 내용을 요구했다. 3개월간의 조사를 거쳐 최근 시 정부에 전달했다.” -이번 폭동에서 한인들의 피해가 컸다. 한인 업소들이 타깃이 된 것인가.  송: “한인 업소들이 타깃은 아니다. 폭동이 발생하고 이동하는 선상에 한인 업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흑인들이 필요로 하는 주류나 뷰티 서플라이 업소들이 많이 당했다. 대부분 한인이 운영한다. 한인들 피해는 절대로 한-흑 갈등이 아니다. 폭동 이후 일부 단체들이 한-흑 갈등 문제를 얘기하는데 절대로 아니다.”   -메릴랜드 한인사회에서 볼티모어가 갖는 의미는 크다. 하지만 여러 환경이 한인커뮤니티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한인사회가 헤쳐나갈 방안은.  송: “단합해야 한다. 단체들이 한인회를 중심으로 모이고, 한인사회의 목소리를 집중해야 한다. 앞으로 이에 대해 좀더 깊게 논의를 해야 한다.”   최: “한인 커뮤니티는 이제 우리끼리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다른 커뮤니티와 어울려야 하고 그 속으로 들어가야 답을 찾을 수 있다.”   성: “투표를 통해 우리의 대표를 선출하는 것도 중요하고, 한인들 스스로 정치인을 길러야 한다. 폭동 당시 볼티모어에 2~3명의 한인 정치인이 있었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백: “볼티모어 시장 예비선거에서 이긴 캐서린 퓨 후보의 승리 파티장에 갔다. 뜻밖에 목사들이 많았다. 한인 사회도 교회들이 참여해야 한다.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도록 목사들이 나서야 한다. 이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생활의 문제다.” -볼티모어 폭동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백: “1979년 눈폭풍이 있었다. 당시도 도시 기능이 마비됐다. 가게는 다 털렸다. 이후 눈만 오면 가게에서 잤다. 이번 폭동은 나에게 두 번째 폭동이다. 한인들을 대변할 단체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꼈다. 한인회가 우리들의 보험이다. 평소에는 있으나 마나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목소리의 창구 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 “폭동의 여파가 한인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으로 작용하면 좋겠다. 한인 커뮤니티가 더 가까워지고, 비즈니스인들이 한 단계 발전하는 등의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   송: “당시 한인회와 교계가 한 덩어리 됐다는 것에 의미가 크다. 하지만 아직도 따로 논다. 개인적인 일이라 생각하지 말고 한 덩어리가 됐으면 좋겠다.”   최: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원봉사한다는 정신, 젊은이들과 일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다만 아쉬운 것은 긴급 상황에는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일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정리=허태준 기자

2016-04-29

더딘 변화, 높은불신의 벽…여전한 긴장감

볼티모어 폭동 1주년을 맞아 주류언론들은 일제히 특집기사로 볼티모어의 지난 1년간 변화와 현재를 조명하고 있다. 기사들은 공통적으로 26일 민주당 예비선거와 함께 볼티모어 시의 새로운 시장의 윤곽이 들어날 것이라면서, 폭동 1년 후인 현재에도 볼티모어는 살인사건 증가와 빈곤한 흑인 저소득층의 소외된 삶으로 시름하고 있는 상태라고 진단했다. 기사들은 볼티모어에 시민들 및 공무원들의 각성과 함께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일어나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CNN : “볼티모어가 ‘원죄’와 마주한다” 볼티모어 시민들 중 일부는 ‘볼티모어 폭동’은 ‘봉기’(uprising)였다고 믿고 있다. 볼티모어가 당면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그 날 벌어진 사태 한 가운데 섰던 많은 이들이 그 사건을 ‘폭동’이냐 ‘봉기’냐 하나로 결론짓지 못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방화가 있었고, 약탈이 있었다. 볼티모어 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사건을 완전히 매듭지을 수 있는 구심점과 리더를 찾고 있는 상태다. 지역 변호사로 볼티모어 시의 역사를 주제로 각종 서적을 출간해온 에덴 스파라코는 “볼티모어 폭동이 일어난 이후 모든 것이 정지된 채로 모든 이들이 누군가가 나서 무엇인가를 해주기를 기다리고만 있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이런 가운데 볼티모어는 26일 열리는 민주당 시장후보 경선의 결과로 새로운 시장을 맞게 된다. 이 선거가 볼티모어의 미래를 결정 지을 것이라는 의견이 크다. 이와 함께 5월부터 재개되는 일련의 재판으로 여섯 경찰관들의 유죄여부가 결정되면, 프레디 그레이의 죽음으로 야기된 볼티모어 사태는 어느정도 결말을 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하지만 선거로도, 재판결과로도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있다. 폭동 이후 볼티모어의 살인사건 발생률은 사상최고 수준으로 급증했다. 2015년에 기록된 344건의 살인사건은 시 역사상 두 번째로 높다. 살인사건의 해결 및 범인 체포율은 30%에 불과하다. 시민단체들은 폭동 이후 경찰 순찰이 줄어들었고 치안의 공백이 커졌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편으로 거리의 주민들은 폭동의 결과로 볼티모어를 지배했던 마약 조직들의 역학관계가 바뀌었다고 말한다. 폭동당시 불탔던 CVS 등 약품상에서 도난당했던 마약성 진통제 ‘펄코세트’ 등이 대거 유통되며 마약조직의 ‘전쟁’이 벌어졌다는 보도도 있다. 볼티모어가 정상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해답은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해결에 앞장서느냐에 달려 있다. 주민과 시관계자들뿐만이 아니라 메릴랜드 주전체의 정치인들과 지역사회가 볼티모어의 경제회복을 위해 나서야 한다. 볼티모어 시내의 극빈층에 몰린 흑인들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한계에 도달하는 상태다. 불씨가 생기면 또다시 타오를 것은 자명한 일이다. 볼티모어 폭동과 같은 또다른 사태가 벌어진다면, 이는 위정자들의 방관과 무책임 탓일 것이다. 볼티모어 선 : “그레이 죽음 이후, 변화는 있는가?“ “볼티모어 폭동은 감정적인 분노의 표현이었나? 변화를 원한 몸부림이었나?” 볼티모어 폭동 1주년을 앞두고, 자말 브라이언트 목사는 주민들에게 26일 열리는 메릴랜드주 예비선거의 참여를 종용하며 이렇게 외쳤다. 프레디 그레이의 죽음을 둘러싼 대혼란이 펼쳐지고 1년이 지난 볼티모어. 2015년 4월27일의 그 날의 의미를 찾기위한 거대한 분석작업들이 여기저기서 펼쳐졌다. 시민운동가들은 볼티모어의 변화를 일으킬 선거 및 정치참여를 촉구하며 연일 행동하고 있다. 시장선거에 뛰어든 후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볼티모어의 개혁과 발전을 이룰 적합자라며 외치고 있다. 그레이를 사망케 한 경찰관들의 재판 결과와 관계없이 경찰국은 변화와 화합, 주민들과의 공존을 위한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경찰국은 순찰을 강화했다. 주민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갈 길은 아직도 멀다. 하지만 분명히 진전은 있었다. 슬램가 흑인 꼬마들이 경찰관의 이름을 부르며 친근히 이야기한다. 한 동네에서 발생한 강간사건에 수십명의 경찰관들이 일일이 지역 가정집을 탐문하며 수사에 나섰다. 폭동 이전에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그러나 그레이의 죽음에 관련된 경찰관들의 재판이 다음달부터 재개되면 경찰국의 노력은 또다시 물거품이 될 수 있다. 모든 지역사회가 재판결과를 지켜볼 것이다. 이런 가운데 천만 다행인 것은 심각한 방화 및 약탈에 가담한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폭동 가담자들이 기소중지 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존스홉킨스대학 사회학과 스테파니 데루카 교수는 “기회가 있었고, 대화가 있었으며, 이제 에너지도 생겼다. 이제 볼티모어는 무언가 변화가 이뤄질 시점에 도달했다”며 긍정적인 미래를 예측했다. 한편 사회학자들과 시민단체 전문가들은 저소득층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지원이야말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티모어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입을 모은다. 대학진학을 통해 안정적인 직업을 갖게 된 저소득층 출신 흑인 젊은이들 대부분이 출신지역으로 되돌아와 지역사회를 살찌우는 선순환에 기여한다는 것이 학자들의 연구결과다. USA 투데이 : “1년 지났지만 여전한 긴장감…갈등은 진행상태” 25세 흑인 프레디 그레이의 죽음은 하나의 상징으로 우뚝섰다. 선거철을 맞아 거리에 나붙은 수많은 시장 후보들의 포스터는 담벼락 한귀퉁이를 차지한 거대한 그레이의 얼굴 벽화에 빛이 바랜다. 길거리의 아티스트들은 볼티모어 거의 모든 모퉁이 벽에 억울하게 죽은 그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어떤 것은 평화를 갈구하고, 어떤 벽화는 투쟁을 선동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어떠한 해결책을 촉구하고 있다. 그레이의 마지막 모습을 근처에서 목격했다는 제임스 브라운씨(54)는 “그의 발은 부서진 상태였다. 경찰들은 관을 들쳐매듯 그레이를 들어 경찰 벤에 쑤셔넣었다”고 증언한다. 참혹했던 그의 죽음으로 얼마간의 변화는 생겼다. 이제 모든 경찰 벤에는 감시카메라가 부착됐다. 경찰측은 시민들과의 갈등 해소를 위한 여러 프로그램을 실시중이고 불탄 업소들은 재건되고 있다. 올 12월 퇴임을 앞둔 스테파니 로울링스-블레이크 시장은 62만1000여명의 시민들에게 보다 나은 볼티모어를 남기고 떠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시장은 “우리가 폭동을 겪으며 확인한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 지역사회의 ‘강인한 회복력’이다. 최악의 나날들을 뒤로하고 정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내와 노력으로 볼티모어시는 빠르게 나아지고 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같은 시장의 의견에 다수의 주민들은 고개를 가로 젓는다. 회복은 완전치 않다. 절망한 상인들과 발전에서 소외된 저소득층 주민들은 그때처럼 탄식하고 있다. 그레이가 살았던 곳과 사정이 비슷한 도시 곳곳 슬램가 주민들과 경찰 사이에 자리잡은 뚜렷한 긴장감은 여전히 깊고 쓰라리다. 볼티모어 경찰국 케빈 데이비스 국장은 USA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프레디 그레이 사건의 큰 원인은 80년대 마약전쟁 시기에 확립된 경찰의 범죄자 대응 문화와 경찰들의 슬램지역에 대한 편견이 여전히 제자리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데이비스 국장은 “도시의 치안은 경찰만이 아니라 학교와 시민단체, 각 공공기관의 공조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세용 기자 park.seyong@koreadaily.com

2016-04-26

무너진 아메리칸 드림서 새로운 희망 일군다

차례 1. 폭동 그 후 1년 현장 르포 2. 폭동 1주년 주류언론 시각 3. 좌담회 - 회고와 희망 찾기 지역사회는 물론 전국을 충격에 휩싸이게 한 볼티모어 폭동이 일어난지 오는 27일이면 일년이 됩니다. 당시 폭도들의 약탈과 방화로 인해 피해를 입은 한인업소만 100곳이 넘습니다. 폭도들에게 폭행당해 중상을 입은 상인들의 소식까지 들려오면서 한인들은 비통에 잠겨 탄식을 내뱉었습니다. 본지는 폭동 1주년을 맞아 세 차례에 걸쳐 절망을 딛고 새롭게 일어서는 상인들의 모습과 폭동 1주년을 바라보는 미 주류사회의 시각을 전하는 한편 한인지도자들과 함께 아직도 아물지 않은 아픔을 달래고 새 희망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1968년 이후 거의 반세기 만에 재현된 무법천지. 메케한 연기와 화염, 투석전, 무차별 파괴와 약탈, 지난해 4월의 끝자락 볼티모어의 풍경이다.   폭동의 진원지에서 한인 상점들은 처참하게 짓밟혔다. 분노와 화풀이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하룻밤 새 망가진 400여 업소 중 25%가량이 한인 업소였다. 쑥대밭으로 변한 가게를 바라보며 억장이 무너졌다. 이들에게 가게는 삶의 터전이고, 바로 아메리칸 드림이었기 때문이다.   폭동의 회오리가 휩쓸고 지나간 지 꼭 1년. 여전히 볼티모어 사태는 현재 진행형이다. 폭동의 상처와 흔적도 곳곳에 남아있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이 약이던가? 피해 한인들 상당수는 새로운 희망을 위해, 또 다른 일부는 살기 위해서 쓰라린 아픔을 기억의 뒤편으로 밀어내고 오늘도 삶의 현장에서 치열한 재기의 몸부림을 펴고 있다.   지난 20일 폭동의 시발점이 된 고 프레디 그레이가 살던 동네를 찾았다. 볼티모어 서쪽 샌드타운-윈체스터다. 빈집들이 곳곳에 널려 있는 가장 낙후한 지역 중 하나다.   이곳에서 30여 년째 그로서리를 운영하는 그레이스 여 씨. 폭동 당시 4개의 가게 중 한 곳이 전소됐다. 가게 이름은 한국식인 ‘해 뜨는 마켓’이다.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자물쇠가 굳게 잠가져 있다. 입구 처마는 불에 탄 시커먼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철조망 사이로 들여다본 내부도 일부는 수리했지만, 불에 탄 냉장고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하지만 가게 옆 건물 외벽은 벽화 그림으로 가득 찼다. 호랑이와 독수리, 사람의 눈동자, 아프리카 야수인 팬더스 등이 화려한 색으로 그려져 있다. 폭동 사태 이후 메릴랜드 미대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이 수소문 끝에 그녀를 찾아와 희망을 노래하며 그린 그림이다. 상처 속에서 새살이 돋는 것처럼 희망의 속삭임이기도 하다.   “처음 두 달은 너무나 어수선했어요. 불에 탄 가게도 가게지만, 미국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어요. 또 원망스러웠죠. 여러 생각이 다 들었어요. 하지만 내 터전이 여기라는 것, 나를 통해서 이곳을 변화시키겠다는 생각이 더욱 커졌어요””   1981년 이곳에 정착한 여 씨에게 샌드타운은 제2의 고향이다. 이곳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모두 ‘마마’라고 부를 정도로 이민자가 아니라 터줏대감이기도 하다.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이 지역에 희망을 불어넣자는 의미로 그녀는 가게 이름을 ‘해 뜨는 마켓’, ‘불루밍 선’, 블루밍 드림스 마켓, 뉴 샌드타운 마켓 등으로 지었다. 그런 그녀의 가게가 불에 탄 것이다.   가게를 복구하기 위해 그동안 SBA 융자 등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자격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시 당국으로부터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여 씨는 “결국 내가 해나가는 수밖에 없어요. 어쩌면 하나님이 나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신 것으로 생각해요. 해 뜨는 마켓은 6월 중에 다시 오픈할 생각입니다. 이곳에 평화를 심을 겁니다”라며 담담하게 말했다.   여 씨의 가게에서 조금 떨어진 모셔 스트리트 선상의 OK 그로서리. 황정연 씨가 방탄유리를 앞에 두고 고객들에게 물건을 건네준다. 그의 가게도 그날 털렸다. 하지만 남다른 유명세는 그 뒤에 이어졌다. 폭동이 나고 며칠 후 경찰과 언론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레이 호송차가 가게 앞 사거리 부근에서 멈춰선 지역으로, 사망 사건의 중요한 단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내달 열리는 경찰관 재판에 참고인으로도 이름을 올렸다. 그에게 볼티모어 폭동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 사건 이후 가게를 포기하고 싶은 맘이 굴뚝 같았어요. 장사도 안될뿐더러 자꾸 생각 안 하려고 해도 생각나고, 지금은 그냥 흐르는 대로 가자는 생각뿐입니다.”   펜실베이니아 애비뉴 선상의 원더랜드 리커스토어. 21년째 가게를 운영하면서 작년 같은 상황은 처음이었다. 모든 물건이 다 털린 것이다.   윤혜경 씨는 “새벽에 알람이 울렸지만, 어떻게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물건만 훔쳐가고 장비를 부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폭동사태 이후 다시 가게 문을 열자 고객으로 오던 일부는 문을 열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는지 “다시 오게 돼 고맙다.”, “맘 우리가 앞으로 도와주겠다.”, “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고 윤 씨는 말했다.   노스 애비뉴 선상의 킴스 리커스토어. 이한엽씨 가게다. 폭동 이후 하루 만에 다시 문을 열었지만, 진절머리 나는 사건에 가게를 내놓았다. 하지만 팔리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버텨가고 있다.   “ CCTV에 밤새도록 찍힌 장면을 보고 처음에는 경찰에 신고, 이들을 다 감옥에 보낼까 생각도 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약해지면서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어요.”   다만 폭동 사건 이후 아이들이 오히려 순진해졌다고 덧붙였다. CCTV에 찍힌 걸 아는지 그 이후 1년 동안 단 한 건의 도둑도 없었다고 말했다.   볼티모어 서쪽 루트 40 에드먼슨 부근의 프레디스 리커스토어. 약탈범들에 폭행까지 당한 박영민 씨다. 당시 10만 달러 가량을 털렸다. 약탈 후 3개월 만에 다시 오픈했다.   박 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생각을 안 하려고 합니다. 의욕을 잃었어요. 가게도 내놓았지만 팔리지가 않습니다”고 말했다. 일부 보험 처리는 됐지만, 턱없이 부족한 액수고, 바로 옆 빈집 철거 공사까지 겹치면서 매출도 오르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때문에 집도 규모를 줄여 아파트로 이사했다.   “미국에 와서 첫 가게였어요. 13년 동안 지탱해 준 고마운 동네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지금은 정이 떨어졌어요. 그만 두려고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어요. 후회는 없어요.”   삶의 의욕이 떨어진 박 씨 부부는 최근 들어 매주 화요일에는 일찍 문을 닫고 배드민턴 동우회 활동으로 의욕을 보충하고 있다.   폭동의 기억에 아직도 몸서리치는 이들도 있다. 김종민·김영미 씨 부부다. 김 씨 부부는 볼티모어에서도 다운타운에 있는 가게를 운영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폭동은 이들의 삶의 터전까지 앗아갔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어요. 한 달 동안 술만 먹고 살 정도로 폐인이 됐지요. 아내는 자다가도 악몽에 벌떡 일어날 정도였어요. 볼티모어라는 이름만 나와도 정색을 했으니까요.”   결국, 이들 부부는 가게를 팔기도 전인 지난해 12월 볼티모어를 떠났다. 13년 동안 청춘을 쏟아부은 가게를 포기할 정도로 볼티모어가 싫었기 때문이다. 고객을 예전처럼 대할 수 없다는 것도 떠난 이유 중의 하나다.   고민하다 이들은 하워드카운티 컬럼비아 108번 선상에 애나스 커피숍을 차렸다.   김종민 씨는 “커피는 마실 줄만 알았지 만드는 방법을 몰라 처음에는 두려움과 걱정이 많았어요. 이제 한 5개월쯤 하다 보니 손님의 취향을 맞춰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볼티모어보다 수익이 줄었다는 이들 부부는 아직은 젊어서 스스로 선택에 결코 후회가 없다면서, 커다란 욕심 없이 열심히 사는 것으로 만족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사람에 대한, 이웃에 대한 고마움도 표시했다.   “사람 때문에 힘들었지만, 큰 사건을 경험하면서 주위에 의외로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결국 사람들로 인해 힐링되고, 살아가는 힘을 얻었습니다.”         ☞볼티모어 폭동 일지  4월 12일 프레디 그레이 경찰 체포후 1주일만에 사망  4월 27일 그레이 장례식 이후 폭동으로 번짐,  4월 28일: 주 정부 비상사태 선포, 야간 통행금지, 주 방위군 투입  4월 29일: 한인 공동대책위 구성  5월 1일: 시 검찰, 경찰관 6명 전격 기소  5월 3일: 야간 통행금지 해제 허태준 기자

2016-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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